2025년 8월 말 인도네시아에서 시위가 발생하며 곳곳의 방화와 습격이 벌어지고 있다. 시위 과정에서 장갑차에 20대 남성이 치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시위대가 의회 건물을 방화, 직원들이 사망하는 등의 유혈 사태까지 발생하고 있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프라보어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의 집권의 결과다. 그는 박정희 시절 전두환과 같은 인물이었다. 독재자 수하르토의 총애를 받아 그의 딸과 1983년 결혼하고 이후 육군의 총아로 승승장구했다. 1992년에는 육군 전략예비대(Kostrad) 공수부대장으로서 동티모르 작전에서 민족해방군 사령관 샤나나 구스망(Xanana Gusmão)을 반역죄로 체포했다. 구스망은 동티모르 독립 이후 초대 대통령이 된다.
1994년 육군 특수부대 부사령관, 1995년 특수부대 사령관(소장)을 거쳐, 1998년 육군 전략예비대 사령관으로서 46세로 중장까지 올랐다. 육군 특수부대와 전략예비대는 모두 육군 최정예로, 이 둘의 사령관은 육군 내 요직 중 요직이다.
1990년대 군 내외에서 수하르토 독재를 비판하는 군인이나 정치인을 무력으로 입막음하는 데 앞장섰다. 특히 당시 야당 민주당을 탄압해 1996년 민주당 당내 정변을 공작하고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를 실각시켰으며, 1997년 수하르토를 비판하는 압두라만 와힛도 탄압해 그에게 동조하는 성직자들을 암살하기도 했다. 1997년 반정부 시위가 격해지자 프라보워의 탄압도 더욱 강경해져 주요 민주화 운동가 22명을 납치 감금했으며 그 가운데 13명은 여전히 실종 상태이다. 그는 인도네시아 군부 실세였다.
군사정부가 무너진 이후에도 그의 권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군과 정제계에서 쌓아둔 인맥을 이용해 기업가로 변신하고, 카자흐스탄 석유 사업에 진출했다. 그러다 광산업, 팜유 농업, 목재, 제지 등을 취급하는 사업을 시작해 엄청난 부를 쌓았다. 프라보워의 누산타라 그룹은 오늘날 인도네시아와 해외에서 27개의 산하 기업체를 거느리고 있다.
2008년에는 자신을 지지하는 골카르 내 우파 파벌을 데리고 나와 위대한 인도네시아 운동당을 창당하고, '신자유주의와 싸우는 인도네시아의 용사'로 스스로 홍보했다.
그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지만 모두 당시 조코위에게 패배했다. 그러면서도 조코 위도 정부의 국방부 장관으로 사실상 연합정권의 한축이 되었다.
2024년 선거에서 프라보어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다. ‘귀여운 할아버지’로 새롭게 이미지 메이킹을 했다. 과거를 기억못하는 젊은 층에게 어필하기 위해 틱톡 댄스를 추거나 고양이와 교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이미지메이킹을 했다.
그리고 프라보어는 부통령으로 조코위 전 대통령의 장남인 기브란을 세워 연합정권을 이었다. 기브란은 나이가 모자랐다. 이를 해결하는 과정에 편법이 이어졌다. 그러나 당시 야권 후보들이 대거 분열되어 이를 막지 못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프라보어는 2024년 10월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그는 국회내 여덟 개 정당 중 일곱 개를 끌어들여 의석의 80%를 장악하는 거대 연립 정당을 구성했다. 이는 사실상 견제와 균형이라는 의회의 기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모든 권력이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사실상 독재 시기로 회귀 되었다. 장관은 기존 34명에서 48명으로 대폭 확대됐다.
연정에 참여한 자신의 세력들에게 이익을 나눠 주었다. 이번 혁명의 발화점이었다.
국회의원들이 주택수당을 명목으로 자카르타 최저임금인 540만 루피아의 10배가 넘는 돈을 받았다는 사실이 언론에 의해 뒤늦게 알려졌다. 이는 우리나라로 치면 월 2,000만 원 수준이다. 인도네시아 국회의원들은 월급에다 주택수당, 유류수당, 식사수당, 통신수당, 이동수당 등을 합해 매월 1억 루피아를 받는다.
그에 반해 서민들의 삶은 날로 피폐해졌다. 제조업 분야 일자리 감소로 노동자들의 불만이 커지는 상황이었다. 2025년 상반기에만 해고된 노동자 수가 4만 2천 명을 넘었는데, 이는 전년 동기보다 32%나 늘어난 수치다. 또한 물가가 크게 상승하고 정부가 재산세를 늘리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연초부터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프라보어는 자신의 핵심 공략이었던 학생 대상 무상급식과 더불어 330억 달러 이상 규모의 건설 프로젝트 같은 포퓰리즘 정책을 추진했다.
결국 이러한 대규모 지출은 재정 압박으로 이어졌고 정부는 2025년 예산안에서 연료 보조금을 대폭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연료 보조금을 일종의 사회 안전망으로 여겨온 국민은 반발하기 시작했다.
나라의 재정이 부족해서 보조금을 삭감하고 동시에 무상급식 정책을
펼치고, 의원들의 월급과 수당을 과도하게 인상하는 것이다. 이런 정부에 대한 불만이 커지는 상황 속에서 설상가상으로 5월에는 노동자들이 메이데이에 맞춰 최저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위가 커져왔다.
8월 25일 꾸준히 세력을 키워온 시위대가 자카르타의 국회 의사당과 전국의 지방의회 건물로 향하며 국회의원들의 과도한 수당을 폐지하라
시위했다. 사태는 점점 과격하게 변했고, 시위대가 돌을 던지자 진압 경찰은 최루탄과 물대포로 강제 해산에 나섰다. 그러다 8월 28일 저녁 의회 인근에서 격렬한 충돌이 벌어지던 중 경찰의 장갑차가 시대 인파
속으로 그대로 돌진하는 장면이 영상에 포착되었다. 이 돌진으로 장갑차는 21세 배달원을 그대로 밟고 지나갔고 20대 청년이 장갑차에 치어 사망하는 장면은 SNS를 통해 확산되었다.
이후 분노한 동료 배달원들이 자카르타 중심부에 기동 타격대 본부로 행진하며 건물에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과격 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시우가 확산되자 프라보어는 연설을 통해 20대 청년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슬픔을 표하며 경찰의 대행이 과도했음을 인정했다. 이후 당국은 당시 장갑차에 탑승했던 기동 타격대원 7인을 구금하여 조사 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럼에도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후에도 시위에 참여한 시민이 사망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프라보어는 중국 방문 계획을 중단하고, 8월 31일 국회의원들의 주택수당 지급을 취소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시민언론 들꽃 편집부